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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州(금주)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 연재를 시작하며

기사승인 2022.03.03  19: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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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錦州)는 우리 고장 금산(錦山)을 고려 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다. 진내(進內)라 부르던 고장에 김신(金侁)이 비단 금(錦)의 이름으로 금의환향하여 금주가 되었던 금산의 유학은 고려 시대 율정(栗亭) 윤택(尹澤)을 그 시작으로 본다. 율정을 시작으로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금주와 인연을 맺음으로 금산을 예로부터 유향(儒鄕), 유림(儒林)의 본향이라 하였다.

장호
금산문화원장

율정의 유현(儒賢)으로의 삶은 아들 윤구생과 손자 윤소종으로 면면이 이어져 삼강행실도에 그 내용이 실렸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보인 야은의 인연은 우리 고장에 불이리(不二里)라는 지역명과 청풍사로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선현들의 꼿꼿한 선비적 삶은 조선시대 단종조에 이르러 곽사(郭師)의 충의로 빛났고, 임진년의 왜란을 맞아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는 의로운 싸움에서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의 충절로 더욱 빛나게 된다. 이 땅을 바름(正)과 의로움(義)으로 나아가게 하는 큰 걸음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으로 남아 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칠백의사를 모신 종용사(從容祠), 1613년(광해군 5) 김신, 윤택, 길재, 김정, 조헌 등을 배향하여 건립한 성곡서원(星谷書院), 1622년(광해군 14) 양성지를 배향하여 건립된 구암사(龜巖祠), 1686년(숙종 12) 윤선거와 윤증 등이 건립한 산천재서원(山川齋書院), 1690년(숙종16) 한교, 이유태, 이유택을 배향하여 건립된 유곡선원(柳谷書院), 1715년(숙종41) 송준길, 송시열, 유계를 배향하여 건립된 용강서원(龍江書院), 숙종 말기에 허목을 배향하여 건립된 석포재서원, 1721(경종1) 이유태를 배향하여 건립된 반계서원(磻溪書院) 등이 건립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이 되어 나라의 학문과 정치와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아갔다.

19세기 중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금산의 모든 서원이 없어지게 되나 구암사숙, 금곡서당 등으로 그 맥이 이어지다 해방 전후 문생계(門生稧)와 비석제를 통해 스승의 선덕을 기리며 현재에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찬연히 이어오던 전통의 유현들의 이야기는 세월에 묻히고 삶에 묻히어 그 빛이 바래고 잊혀만 가고 있다. 우리는 선조들의 얼과 혼이 담겨있는 유현의 역사를 반드시 찾아내 우리 금산 사람들에 정체성을 심어주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후대들에게 금산에 살아가는 자긍심과 바름과 의로움을 전해야 한다. 현재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성곡서원의 뿌리를 찾아 서원 재현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청풍사 야은 길재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는 정신문화원 건립사업과 용강서원 금산 유림의 뿌리를 찾아 청소년 유교 문화 체험관 건립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금산의 잃어버린 역사!

소중한 선현들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모든 분들에게 알리고자 연재를 시작한다.

 

 

금산신문 gsnews4700@naver.com

<저작권자 © 금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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